4세대 방사광 가속기 구축
물질 미세구조·현상 분석
의약분야 등 산업성과 기대
물질 미세구조·현상 분석
의약분야 등 산업성과 기대
■ 르포 - 포항가속기연구소
정확하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의미로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말을 쓴다. '한 치'는 약 3㎝. 포항 4세대 방사광 가속기 시설에서 '한 치의 오차'는 너무 커서 의미가 없었다. 1000조 분의 1초인 '펨토초' 동안 10억 분의 1m인 '나노미터' 단위로 사물을 관찰하기 위해선 상식을 뛰어넘는 정교함이 필요했다.
지난 22일 경북 포항 포항가속기연구소를 방문해 총 1.1㎞ 길이의 4세대 방사광 가속기 내부를 걸으며 장치들을 직접 살펴봤다.
방사광 가속기는 전자가 빛의 속도로 빨라지면 나오는 강한 X선으로 물질의 미세구조와 현상 등을 분석하는 거대 실험시설이다. 햇빛보다 100경 배 밝은 빛을 내는 '4세대' 방사광 가속기는 전 세계에 3대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구축에 성공했다.
두께 2m, 무게 50t에 달하는 거대한 철문을 지나 가속기 안으로 들어갔다. 가속기 시설은 실험 도중 발생할 수 있는 방사선이나 전자기파를 막기 위해 2m 두께 콘크리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일단 가동을 시작하면 안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외부 조종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장치들을 조작한다.
복도에 들어서자 왼쪽에 가속기 장치들이 끝이 소실점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장치는 전자를 만드는 '광음극 전자총'. 연구소가 자체 개발한 이 전자총은 1.5V 건전지 400만 개와 맞먹는 600만 전자볼트(eV) 전자빔을 구리에 쏴 전자가 튀어나오게 만든다.
전자는 구리로 만든 '가속관'을 따라 빛의 속도로 빨라진다. 가속관에는 계속해서 고주파가 공급되는 데, 마치 바다에 뜬 물체가 파도에 쓸려가듯 전자가 고주파를 타고 앞으로 나아간다. 직선으로 710m 이어진 가속관 178개는 200마이크로미터(㎛·100만 분의 1m) 오차 내로 정확하게 정렬해야 한다.
가속기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건축과 토목부터 전기·전자, 제어, 진공, 정렬 등에서 '극한'에 가까운 요구조건을 맞춰야 한다. 전자는 직진하지만,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가속기 시작과 끝에서 약 5㎝ 오차가 발생한다. 이 점까지 고려해 모든 장치를 정렬해야 전자가 계산된 궤도로 나아간다. 가속기 건물 바닥의 평탄도 오차는 ±5㎜ 수준이다. 거제대교(740m)보다 긴 건물 바닥이 손톱 반 마디를 넘지 않을 정도로 일정하게 평평하다는 의미다. 가속기를 지나는 동안 전자궤도의 정밀도는 2㎛ 이하로, 서울과 부산 사이를 비행하면서 궤도를 5㎜ 이상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다.
고주파를 갈아타며 속도를 붙인 전자는 위아래 거대한 영구자석으로 만들어진 '언듈레이터'로 들어간다. N극과 S극이 짧은 거리로 반복해 교차하는 이 장치를 따라 전자는 좌우로 휘어지면서 강력한 빛을 내기 시작한다. 장비 무게는 7t, 자석이 서로 당기는 힘은 10t에 달한다. 250m 구간 동안 20개가 설치된 언듈레이터 장치 하나마다 커다란 에어컨이 달려있어 온도를 25±0.1℃로 유지한다. 온도가 0.1℃라도 높아지거나 낮아지면 장치에 미세한 변화가 생겨 전자 궤도가 달라진다.
여기까지 전자와 X선의 궤도와 파장이 0.005㎚ 오차 이하로 정확하게 일치하면 '결맞음' 현상에 따라 빛의 세기가 병원에서 사용하는 X선의 100조 배에 달하는 'X선 자유전자 레이저'가 만들어진다. 이를 위해선 영구자석 8만 개를 위치 오차 5㎛ 이하로 정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실험실에선 이 빛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단백질이 세포막을 뚫고 들어가는 모습이나, 물이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는 순간 등을 실시간 촬영한다. 지난 6월까지 1차 시운전, 하반기 2차 시운전을 거쳐 내년부터 과학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과학적 성과는 물론, 산업적으로도 큰 결과물이 예상된다.
이기봉 포항가속기연구소장은 "가장 먼저 성과가 기대되는 분야는 신약 개발"이라며 "기존 신약 개발이 문을 열기 위해 수많은 열쇠를 만들어 일일이 구멍에 끼워보는 식이었다면, 이 가속기를 이용하면 구멍 모양을 먼저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열쇠를 만드는 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수 4세대방사광가속기구축추진단장은 "가속기는 빛이 머리카락 하나를 관통하는 시간 동안 일어나는 초고속 화학반응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며 "물이 수소와 산소로 결합하거나 분해되는 순간을 관찰해 수소를 생산하는 값싼 방법을 찾으면 기존 에너지 산업을 모두 대체할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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