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 60년대 해외거주 과학자 유치 위해 주거지원 등 파격대우
"대통령보다 월급 많은 연구원 수두룩" … 국가주력산업 기틀 마련 성과
KAIST, 인재 양성 체계적 시스템 출발점… 80년대엔 석ㆍ박사 과정 확대
포항공대, 학생보다 많은 교수ㆍ선진국 수준 장학금… 우수인력 배출 큰역할
외환 위기 후 이공계 기피 위기… 2004년 특별지원법 만들어 극복 노력도
1966년 설립된 국가과학기술연구원(KIST)의 별명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였다. 이곳에서 연구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연구한 자동차, 조선, 철강, 반도체 등은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으로 자리 잡아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이들의 땀과 열정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도 없었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이 땅에 싹을 틔우기 이전, 오랜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 이후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반도는 너무나 척박한 땅이었다. 부족한 자금과 자원, 열악한 정부 시스템과 산업 기반 등 모든 여건이 과학기술 발전을 뒷받침하기에 부족했다.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던 국민과 나라가 기댈 것은 오직 '사람' 밖에 없었다. 해외에 나가 있던 연구자들은 선진국에서의 안정적인 연구환경과 생활을 포기하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고국으로 돌아와 헌신했고, 고급 과학기술 인재를 키우는 것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신념 아래 직접 선진국의 원조를 구해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후손들에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물려주고자 했던 이들의 값진 노력 끝에 나라는 가난을 벗어나 공업화의 길에 들어섰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세계와 첨단 기술로 경쟁하기 위해 더 많은 과학기술 인력이 필요하게 됐다. 기업과 연구소는 귀국한 해외 과학기술자와 함께 국내에서 양성한 새로운 인재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1981년 2만여 명이던 국내 연구원 수는 2001년 17만여 명까지 늘어났다. 2000년대 이후로는 바이오(BT), 나노(NT), 정보통신(ICT) 등 신산업 성장의 주역을 담당할 새로운 고급 과학기술 인력들이 절실해졌고, 이를 위해 이공계특별지원법과 이공계인력기본계획 등을 통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인력양성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2부> (8)"인재가 국가 미래 좌우"
◇험난했던 과학기술 인력 확보 과정=일본강점기에 배출된 조선인 이공계 대학 졸업자는 약 400명, 박사학위 소지자는 고작 10명에 불과했다. 일제는 조선인 중에 고급 과학기술 인력이 나오는 것을 되도록 막으려 했다. 총독부가 1915년 세운 최초의 이공계 고등교육 기관인 '경성공업전문학교'는 겉으로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소수의 일본인이 함께 다니는 형태였지만, 한국인은 대부분 1, 2학년 과정에서 성적이나 태도 등을 꼬투리 잡아 퇴학시키는 바람에 실제 졸업생은 오히려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938년 일제가 대륙침략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전시과학 연구를 위해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를 만들었지만,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한국인 졸업생은 36명뿐이었다. 이들 경성제대 졸업생을 제외한 대부분 조선인 학위자들은 스스로 부담해 일본과 미국 등으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이었다. 당시 해외유학은 민족의 앞날이 달린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유학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오면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만큼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1946년 미 군정은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9개 전문대학을 통합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교수와 학생들의 반대를 시작으로 국대안을 둘러싼 여러 갈등이 좌·우익 대립으로 번지면서 결국 과학자들이 대학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에 이태규, 공과대학 초대 학장에 김동일이 임명되면서 한국 과학기술은 새로운 출발을 하는 듯 보였지만, 곧이어 6·25 전쟁이 발발해서 많은 교수진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유능한 과학자들이 북한으로 넘어가면서 다시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과학기술자=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952년부터는 해외 유학생이 급증하면서 후진국에서 나타나는 '두뇌유출'이 본격화됐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 해외 유학을 떠난 사람은 학생 5600여 명, 교수 1100여 명 등 총 6700여 명에 달했지만, 귀국자는 800여 명으로 15% 정도에 불과했다. 국내에 있던 학생들은 '교수 공동화'로 사실상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어려웠다. 당시 학생들은 스스로 학습모임을 조직해 공부하거나, 조금 앞서 배운 선배들의 가르침에 만족해야 했다.
이런 상황은 1966년 KIST 설립 당시까지도 이어졌다. KIST 설립이 결정되자 연구원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KIST 초대 소장인 최형섭 박사는 안 그래도 부족한 대학 교수를 데려오면 교육에 지장이 클 것이라고 판단하고, 해외에 있는 과학기술자들을 고국에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시 국내 현실은 해외에 있는 과학자들에게 전혀 매력이 없었다. 1965년 당시 국내에서 1만5000원 이상의 월급을 받는 연구원은 82명에 불과했고, 이 급여로는 한 가구가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에 부족했다. KIST는 이런 현실을 감안해 해외 유치 과학자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당시 국내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의료보험을 미국과 계약해 제공하는 등 나름 파격적인 처우를 마련했다. "가난한 조국이 그대들을 기다린다"는 호소에 고국에 돌아온 유치 과학자들의 월급은 당시 국립대학교 교수 월급의 3배에 달했다. 그나마 미국 연구소에서 받는 월급에 비하면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지만, 대통령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 연구원들이 수두룩했다.
다행히 국내에 돌아온 해외 유치 과학자들은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내 산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응용기술을 주로 개발하는 한편, 철강, 조선, 화학, 자동차 등 중화학공업 발전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해 오늘날 국가 주력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KIST가 1969년까지 유치한 연구원 25명 가운데 22명이 첫 번째 계약기간 만료 후에도 재계약을 맺고 KIST에 남았다. 1980년까지 한국을 떠난 연구자는 단 1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KIST에 안착하자 해외에 남아있던 한국인 과학기술자들도 과거와 다르게 귀국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1973년 대덕연구단지가 설립되자 또 한 번 해외 과학자 유치 붐이 일었다. 당시 KIST 연구원으로 일하다 대덕연구단지 내 연구소 소장을 맡게 된 과학기술자들은 미국 등지를 돌며 젊은 한인 과학기술자들을 만나 귀국을 설득하고 다녔다. 1980년대에는 첨단 기술 확보가 시급해진 대기업들이 직접 나서 해외 과학기술자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과 '황의 법칙'을 만든 황창규 KT 회장, '디지털 TV의 아버지' 백우현 LG전자 고문, 이희국 LG 상근고문 등이 이때 한국에 들어온 대표적인 과학기술자들이다.
◇고급 과학기술 인재 육성 시작=1980년대까지 해외 과학기술자 유치는 성공적으로 이뤄졌지만, 계속 늘어나는 고급 과학기술 인력 수요를 모두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해외 선진국의 기술보호주의와 후발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핵심 기술 확보가 절실해졌고, 이를 위해 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더 많은 연구개발 인력이 필요하게 됐다. 결국 국내에서도 수준 높은 전문성을 가진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국내 과학기술 인력양성 시스템 구축의 출발점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다. 1971년 이공계 특수대학원인 한국과학원(KAIS)으로 문을 연 KAIST는 1980년대 석·박사 학위 과정을 크게 확대하고 과학고등학교와 과학기술대학을 신설하는 등 과학영재 교육 체계를 갖춰나갔다. 각 학교에는 최신 교육·연구설비를 갖췄고,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해 수준 높은 교육을 했다. 학생들에게는 병역특례와 장학금 지급 등 특혜를 줘 우수 인재들을 끌어들였고, 특히 정규 교육과정에서 허용되지 않는 월반이나 조기졸업 제도를 도입해 20대 박사가 나올 수 있도록 했다.
1986년에 민간 자본에 의해 설립된 과학기술 연구중심 대학인 포항공과대학교 역시 우리나라 고급 과학기술 인력 배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항제철(현 포스코) 지원으로 설립된 포항공대는 학생 수는 적게, 교수는 많이 모집해 교수들의 강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이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또 '세계 최고 공과대학'을 목표로 개교 당시부터 선진국 대학에 버금가는 시설과 파격적인 장학금 혜택을 제공해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했다.
이런 포항공대의 행보는 기존 대학들에도 큰 자극이 돼 본격적인 고급 과학기술 인력 양성 경쟁에 불을 붙였다. 1990년대에는 지역별로 우수한 공과대학을 지정해 육성하는 국책공과대학 지원사업과 연구중심대학 지원사업 등이 이뤄졌다. 연구중심대학 지원사업은 학부 중심 교육, 대학원 중심 교육과 직업지향 교육, 학문지향 교육 등으로 전국 대학의 기능 분화를 시도했다. 또 국가연구개발 사업비를 대학에 지원할 때 공모를 통한 경쟁체제를 도입해 대학의 연구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1999년 시작된 '두뇌한국(Brain Korea·BK)21'은 지식기반 사회에 대비해 정부가 석·박사 과정 대학원생을 안정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다. 사업비 대부분을 대학원생들에게 지원해 교수의 교육과 연구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점에서 다른 연구비 지원과 차이가 있었다. 1단계 BK21 사업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7년간 총 1조3000억원을 투자해 석·박사 과정 대학원생과 박사후과정생 등을 지원했다. 이후 1단계 사업을 바탕으로 분야별로 특성화된 연구중심대학을 키우고 10년 후 한국을 이끌어갈 핵심 고급 인력을 양성한다는 목표로 2단계 BK21 사업이 2006년에 시작됐다.
◇이공계 인력 육성 체계화=외환위기 이후 국내에는 '이공계 기피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정이 어려워진 기업들이 기업연구소 연구원들을 감원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과학기술 인력 공급을 목적으로 이공계 대학 및 대학원 설립 허가를 많이 내줬는데, 수요가 갑자기 감소하자 결국 많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처우가 하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0년대까지 이어진 이공계 기피현상은 결국 연구·산업현장의 인재부족 사태로 이어졌는데, 단순히 이공계 전공자 수보다도 석·박사급 우수 인력이 줄어든 것이 큰 문제였다.
정부는 이공계 기피문제 해소를 위해 2004년 4월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이공계지원특별법'을 제정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공계 기피 문제는 양적 측면에서 학생들이 이공계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어느 정도 양적으로 학생들을 확보한 2000년대 말에도 과학 영재들의 의학계 선호와 해외 유출 등 문제가 계속됐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내세우며 과학기술 인재 정책을 이공계 기피 문제를 넘어, 창의적 인재를 키우기 위한 방향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