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규 정경부장
![[임윤규 칼럼] 죽이고 살리고의 문제가 아니다](http://contents.dt.co.kr/images/201605/2016050902102251673001[1].jpg "[임윤규 칼럼] 죽이고 살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죽어가는 말이 아쉬워 어쩔 수 없이 바둑판에 돌 하나 더 놓는다. 대마는 누가 만드나. 버렸어야 할 말에 미련 두고 한수 한수 더 놓다 보니, 어느새 판 전체의 승패를 좌우할 대마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겁도 나고 누구도 죽이기를 주저한다.
부실기업 구조조정 논의가 뜨겁다. 총선 앞두고 민심, 표심 계산하느라 한동안 잠복해 있던 얘기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실 대우조선해양의 근거지 민심은 얼마나 흉흉했나. 그곳 노동자들이 시뻘겋게 눈 뜨고 있는데, 선거 코앞에 어디다 대고 구조조정 얘기를 하겠나. 모두가 조심스럽던 작년 10월 29일, 산업은행은 미지근한 대우조선 자구계획안에 승인하고 슬그머니 자금 지원했다. 산은은 2016년까지 총 4조2000억원의 유동성을 지원하고 산은 책임하에 2조원 이내 자본을 확충하기로 했다. 대우조선에는 1989년부터 작년까지 4차례에 걸쳐 총 6조5000억원의 국민혈세가 투입되는 셈이다. 궁금하다. 그래서 대우조선 살아났나.
여당은 총선에 완패하고, 구조조정 동력을 상실했는데 뜻밖에 다수당이 된 야당에서 구조조정 얘기를 꺼냈다. 하긴, 구조조정이 어디 여야를 따질 일인가. 부실기업이 국가재정을 삼키고, 국책은행을 좀먹고 있는데 가만 놔뒀다간 국가를 거덜 낼 상황이다.
3월 말 기준으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대우조선, 현대상선, 한진해운에 대한 여신 규모가 20조2018억원에 달한다. 대우조선만 따져도 산업은행이 6조3100억원, 수출입은행이 12조7300억원 정도다. 이들 대출자금 등급이 '고정이하' 또는 '추정손실·회수의문' 등으로 재분류된다면 건전성 유지를 위해 자기자본비율(BIS) 최소준수기준 10%에 맞추기 위해서는 새 돈이 필요하다. 작년말 기준으로 수은의 BIS비율은 10.0%, 산은은 14.2%다. 구조조정이 논의되고 있는 조선과 해운기업이 정상화되지 못한다면 두 국책은행이 BIS 비율을 맞추기 위해선 수조원이 필요할 수도 있다. 구조조정과 관련해 국책은행의 자본확충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아직 규모를 언급하지는 않고 있는데, 최소 10조 이상의 신규자금은 필요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정부는 지난 4일 구조조정협의체 태스크포스(TF) 첫회의를 갖고 6월안에 자본확충 규모와 방안을 확정 짓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구조조정 논의는 순서도, 방식도 잘못된 것 같다. 한은에 돈 찍어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청와대와 정부의 태도는 도를 넘는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주열 한은총재를 겨냥해 "국민공감이 무슨 말인가"라며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있다'는 듯 몰아붙인다. 한은은 독립기관이다. 이상한 시스템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게 좋겠지만, 역할과 책임은 분명 따로 있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은 특정 기업 죽이고 살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전체 산업구조개혁의 큰 그림 안에서, 흔들림 없이 냉정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채권단 손실처리가 두려워, 링거 꼽고 연명하는 땜질 처방으론 안된다.
수십조의 국민혈세가 투입된 회사의 경영을 이 지경으로 해 놓고도 책임지려는 사람 하나 없다. 주인 없는 회사라고 권력자의 낙하산으로 CEO가 임명되고, 낙하산이라는 원죄로 노동조합과 적당히 타협해 잔치를 벌인다. 대우조선은 작년 한 해만 5조원의 적자를 냈다. 그 과정에 책임 피하기 위해 부실을 숨기기도 했다. 부채비율은 작년 1년 사이에 6800% 포인트 이상 높아져 7300%를 넘었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과 두 딸은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를 받기로 한 한진해운 주식을 사전에 모두 처분했다. 이들이 매각을 통해 피한 손실은 10억원 정도다. 회사가 구조조정의 수술대에 오르는 상황에 오너 기업인이 보여준 부도덕함의 극치다. 오너가의 이런 부도덕한 사례들은 너무 많아, 열거하기도 부끄럽다. 국가산업이라고, 망가지면 나라 경제 휘청인다고 국민 혈세 투입하는 회사 경영자들은 몇 조원, 몇 백억원도 아닌 단 몇억원 손실 피하겠다고 이런 짓을 저지른다.
지금 우리가 죽이고 살리고를 결정할 대상기업이 국가 존립과 연관돼 있나. 목숨 구하기 위해 팔다리 잘라야 한다면, 죽음의 세포가 심장을 겨냥해 숨통을 조여오기 전에 과감히 자르자. 새로 돌 놓기 전에, 가일 수 할 가치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자.
한은이 찍어내는 돈, 정부의 현물출자 혹은 채권매입 등 방식만 다를 뿐 모두 국민 혈세다. 공적자금 투입의 포장일 뿐이다. 대체 누가 망가뜨린 회사인데, 정부는 국민에게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협박하며 혈세를 쏟아 넣으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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