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 "타인 게시글 삭제권리 빠진 반쪽"
업계 "탈퇴회원 요청도 들어줘라? 과도"
인터넷 이용자 작성 게시물 삭제요청 권리
이해당사자간 팽팽… "정부 무책임" 지적
구글·페북 등 해외사업자와 역차별 우려도
업계 "탈퇴회원 요청도 들어줘라? 과도"
인터넷 이용자 작성 게시물 삭제요청 권리
이해당사자간 팽팽… "정부 무책임" 지적
구글·페북 등 해외사업자와 역차별 우려도
![[알아봅시다] `한국판 잊힐권리` 논란](http://contents.dt.co.kr/images/201604/2016041402101831033001[1].jpg "[알아봅시다] `한국판 잊힐권리` 논란")
한국판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가 이르면 내달 시행됩니다. 정부는 당초 4월 시행을 계획했지만, 검색서비스 사업자 등 인터넷 업계의 반발이 심해지면서 기존 원안을 수정·보완해 5월 말쯤 시행키로 했습니다. 정부와 사업자들은 한국판 잊힐 권리 가이드라인과 관련해 기술적 한계, 절차 문제를 놓고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업계는 왜 정부 가이드라인에 반대할까요. 또 '한국판' 또는 '반쪽짜리' 잊힐 권리를 내놓은 정부의 사연은 뭐였을까요.
지난 3월 25일 방송통신위원회가 '인터넷 자기 게시물 접근배제 요청권 가이드라인'(가칭)안을 발표했습니다. 방통위가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자,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엇갈렸습니다. 학계와 시민단체에선 '반쪽짜리 잊힐 권리'에 불과하다며 평가절하했고, 인터넷 업계에선 '유럽보다 한발 더 나아가 규제가 더 센 잊힐 권리'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먼저 잊힐 권리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잊힐 권리의 시작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스페인 변호사였던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는 1998년 스페인의 한 매체에 실린 자신에 대한 기사와 구글의 검색 링크가 사생활을 침해한다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기사 내용은 곤잘레스의 채무 내역과 재산 강제매각 등을 다룬 것이었는데, 소송 제기 시점에는 문제가 해결됐는데도 기사가 여전히 구글 검색결과로 노출된다며, 구글과 해당 신문사를 스페인 개인정보보호원(AEPD)에 신고한 것입니다. AEPD는 구글 측에 해당 링크를 삭제하라고 지시했지만, 구글이 이에 불복하면서 사건은 유럽 사법재판소(ECJ)까지 넘어가게 됐습니다.
2014년 5월 13일, 세계의 눈이 쏠린 재판에서 ECJ는 잊힐 권리를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적 판결을 내립니다. 재판부는 구글 검색 엔진을 이용하는 사람은 '잊힐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며, 곤잘레스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또 구글은 이용자가 부적절하거나 시효가 지난 개인정보 삭제를 요청할 때 이에 응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이 판결로 구글은 별도의 개인정보 삭제 요청 링크를 만들고, 삭제 신청을 신청받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30여 유럽 국가에서 이 판결이 적용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유사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우선하는 미국에서는 최근 캘리포니아주에서 미성년자에 한해 삭제 요청권을 주는 관련 입법이 진행 중입니다.
ECJ의 판결 이후로 국내에서도 잊힐 권리에 대한 논의가 본격 시작됐습니다. 방통위는 2014년 연구반을 꾸리고 국내 제도 도입을 논의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올해 3월 방통위는 2년여 연구결과를 발표하게 됩니다. 방통위 측은 잊힐 권리의 원활한 국내 도입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이용자 본인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이번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고 밝혔습니다. 최근 국내 인터넷업계의 최대 이슈인 '한국판 잊힐 권리'의 시작입니다.
해외에선 사생활 보호와 표현의 자유 침해 등을 놓고 업체와 이용자 간 논쟁이 주를 이루지만, 국내 사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방통위가 사실상 '반쪽짜리' 잊힐권리 가이드라인 초안을 내놓으면서 이해당사자 간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방통위의 이번 가이드라인 초안은 법인을 제외한 인터넷 이용자 누구나 인터넷 게시판 관리자, 검색서비스 사업자에게 자신이 올린 게시물에 대해 접근배제(게시물 삭제)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올린 게시물 대부분을 삭제할 수 있는 권리인데요. 보통의 경우 자기 게시글을 삭제할 수 있지만, 게시글에 댓글이 달리거나 회원 탈퇴 등으로 회원정보가 파기된 경우, 게시판 사업자가 폐업해 사이트 관리가 중단된 경우, 고인의 경우에는 자기 글을 삭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통위는 이같은 문제에 따라 '최소한의 범위에서' 잊힐 권리를 시행키로 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타인이 작성한 나에 대한 비방글 등 게시물 삭제 권리가 빠졌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잊힐 권리라고 비판했습니다. 인터넷 사업자들은 이번 가이드라인이 잊힐 권리로 불릴 경우 혼란을 빚을 수 있다며 가이드라인과 잊힐 권리 구분을 요청했습니다.
인터넷사업자들은 이번 가이드라인이 세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항을 담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국내 정보통신망법이 정한 이용자는 서비스를 이용 중인 사람을 전제로 하는데, 탈퇴한 회원도 삭제 요청시 들어줘야 하고 죽은 사람까지도 대리인이 요청하면 게시물을 삭제해야 하는 것은 국내 법을 넘어선 과도한 조치라는 주장입니다.
일부 사업자들은 또 정부가 사업자에 책임을 전가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방통위 가이드라인 초안에선 신청자의 게시글 삭제 여부를 '사업자가 유추 가능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토록 하고 있는데, 사업자와 이용자 간 분쟁 가능성만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더 나아가 국내 사업자들은 구글과 페이스북 등 해외사업자들과의 역차별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공표해도, 해외 사업자가 따를지 미지수라는 것입니다. 방통위는 "해외사업자들과 가이드라인 준수를 위해 협의 중"이라고 답했지만, 해외 사업자가 실제 준수할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라는 게 국내 인터넷 사업자들의 시각입니다.
국내 인터넷 사업자들은 최근 인터넷기업협회를 통해 방통위 측에 가이드라인 수정을 요청했습니다. 방통위도 지난 11일 전체회의를 열어 인터넷사업자들과 각계 의견을 수렴해 기존 원안을 수정·보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최종안이 확정된 후 시행 시기는 5월 말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최성준 방통위 위원장은 지난 회의에서 앞으로 잊힐권리에 대한 정부와 업계 논의가 진전되면 해외에서 논의 중인 잊힐권리 도입도 가능할 것이란 의견을 전했습니다. 이용자는 물론 인터넷기업과 이를 감시·감독하는 정부가 '잊힐 권리' 시행을 위해 풀어야 할 숙제는 아직 많아 보입니다.
정채희기자 poof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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