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한국과학원과 통합 한국과학기술원 새 출발
연구부문 감독·관리 강화 '연구원 자율성 확보' 훼손
교육·연구 대표기관 통합 부작용 '잘못된 만남' 평가
1989년 독립 재출범 뒤 위축됐던 연구활동 활기 회복
신소재·첨단복합기술 등 '미래 원천기술' 개발 주력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1부> (3) 위기 후 살아난 KIST의 `혁신 DNA`
중화학공업 발전 계획과 기업의 애로기술 해결 연구 등으로 60~70년대 공업화를 견인한 KIST는 80년대로 넘어오며 산업 고도화에 따른 첨단기술 개발과 창조적인 원천기술 확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된다. 1981년 한국과학원(KAIS)과 통폐합으로 연구 활동이 주춤한 시기도 있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며 여러 성과를 거뒀다. 1 KIST 연구진이 1981년 광통신용 광섬유를 개발하기 위해 실험을 하고 있다. KIST 제공
"연구자들은 자유를 먹고 산다. 그 자유가 사라지니 연구에 신바람이 나지 않았다."
1968년 141번째 연구자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입소한 안문석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전산시스템개발실장으로 활동하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1981년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1966년 설립 이후 괄목할만한 성과들로 우리나라의 공업화를 견인해 온 KIST는 1980년대 문턱에서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1980년 11월 13일 신군부는 각 부처로 분산돼 있던 16개 과학기술 관련 연구소를 과학기술처로 이관해 9개 연구기관으로 통폐합한다고 발표했다. 1970년대 중순부터 10여 곳이 한꺼번에 생긴 전문연구기관이 제대로 자립하지 못하자 정부출연금 부담이 높아졌고, 과학기술처와 상공부, 체신부, 동력자원부 등으로 관리기관이 분산돼 통괄조정이 힘들다는 이유였다.
KIST도 외풍을 비껴가지 못했다. 정부의 통폐합 정책에 따라 1981년 1월 5일 KIST는 한국과학원(KAIS·현 KAIST)과 통합돼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새로 출발하게 됐다. 하지만 한국 과학기술계에서 '교육'과 '연구' 분야를 각각 대표하던 두 기관의 통합은 결국 여러 부작용을 낳으며 '잘못된 만남'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2 1984년 구축한 태양·풍력 복합발전시스템 전경. KIST 제공
◇통합으로 인한 KIST의 위기=KAIST 통합은 시작부터 자연스럽지 않았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기관을 뚜렷한 문제도 없는데 억지로 합친 것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뤄진 대응이라기보다는 당시 사회적 개혁 분위기와 이에 편승하고자 한 신군부의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다. 70년대 말까지 과학기술계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군 인맥, 특히 육군사관학교 출신 인맥이 두 기관의 통합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해석도 있다.
목적이 다른 집단을 억지로 붙여놓자 서로 다른 문화로 인해 여러 문제점이 나오기 시작했다. 통합된 KAIST가 학사업무 중심으로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연구부문에서는 우수한 인력 확보와 장기 대형 연구과제 수행을 위한 예산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통합에 따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육성법'을 폐기하고 새로 제정한 '한국과학기술원법'에 의해 KIST와 관련된 연구부문은 오히려 정부의 감독과 관리가 강화돼 KIST의 설립 원칙 중 하나였던 '연구원의 자율성 확보'가 흔들리게 됐다.
KIST 설립 당시 초대 원장인 최형섭 박사는 KIST 육성법안이 만들어질 당시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로부터 연구계획 승인과 회계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항목을 없앴다. 정부의 간섭을 없애고 자율성을 보장해야 연구원들이 창의성을 갖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다는 철학 때문이었다. 최 박사가 기대했던 대로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만큼 책임감을 갖고 연구에 매진했던 연구원들 덕에 KIST는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어설픈 통합이 이 불을 꺼버린 것이다. 실제로 당시 변화된 환경에 불만을 품은 KIST의 우수한 연구인력들이 퇴소하거나 학교 등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례가 많았다.
안 명예교수는 "감사원에서 감사를 나오니 열심히 일 한 사람만 욕을 먹고 오히려 일을 안 하던 사람은 괜찮았다"며 "당시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계로 떠난 연구원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교수직의 수평적 조직과 연구직의 수직적 조직 간 문화 차이 등으로 숱한 어려움을 겪던 KAIST는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구원과 교수 사이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통합 KAIST는 1989년 6월 분리돼 연구 영역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으로 독립하고 학사 부문만 KAIST로 남아 대덕으로 이전하면서 7년간의 불편한 동행을 마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3 KIST 연구자가 1988년 개발한 광자기 디스크를 들어 보이고 있다. KIST 제공
◇변화에 직면한 KIST=비록 통합은 잘못 둔 한 수였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며 KIST 내부적으로도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등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산업계의 연구 수탁은 크게 줄었고, 산업이 고도화 추세로 발전하면서 추격·모방 기술보다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첨단 기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다.
정부는 1981년 10월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을 확정하면서 첨단기술 국산화와 핵심기술의 토착화를 위해 국책연구개발사업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과학기술처는 기술개발촉진법을 개정해 '특정연구개발사업' 추진의 기본 방향을 정하고, 1982년부터 출연연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책연구개발사업을 시작했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주요 추진 분야는 반도체·컴퓨터 등의 정보기술과 정밀화학·기계기술 고도화·신소재·생명공학 등이 있었다. 앞으로 성장 가능성은 있으나 기업 단독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선진기술을 모방·개량하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다. 그 결과 KIST도 이전에 해왔던 산업현장의 애로기술개발 대신 선진국에서도 실용화 이전 단계에 있는 새로운 첨단기술을 연구해야 했다.
통합 초기 크게 위축됐던 연구 활동은 1980년 후반부터 활기를 찾기 시작했고, 첨단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가 나기 시작했다. 아라미드 섬유 개발은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돼 학술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지원한 도핑 컨트롤 사업은 우리의 과학기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춘식 박사의 태양·풍력 복합발전시스템 개발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신재생에너지 개발 연구의 효시가 됐다.
4 는 1993년 프레온(CFC) 대체물질 개발 모습. KIST 제공
◇재출범 이후 '미래 원천기술 개발' 주력=재출범 이후 KIST가 중점을 둔 분야는 창조적 원천기술 개발을 통해 기초원천 성과를 산업기술에 접목하는 연구 영역이었다. 당시 KIST의 연구제도와 연구 경험을 공유한 전문연구소들이 상당한 연구개발(R&D) 인프라를 갖추기 시작했고, 일부 대학들도 점차 기초연구가 활성화됐다. 국내 대기업 부설 연구소들도 산업현장에서 요구되는 기술을 자체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KIST는 그동안 해오던 선진 기술의 모방·추격형 연구는 관련 전문출연연구소에 넘기고,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목표를 강조했다. 이를 위해 KIST는 신소재와 첨단복합기술, 산업원천기술, 공공복지 기초기술 개발 등을 주요 연구 방향으로 설정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KIST 특성화 계획을 수립해 '중장기 미래 원천기술개발 전담 연구기관'으로 역할을 재정립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전략으로 1994년 독자적으로 마련한 첫 대형 프로젝트인 'KIST-2000' 사업을 추진했다. 이 프로젝트는 기존의 추격형 연구에서 벗어나 창의적 연구 개발에 도전한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프로젝트 추진을 위해 1994년 8월 'KIST-2000 사업단'이 설치됐고, 첨단의료과학기술·정밀소재공정기술·차세대 멀티미디어 첨단소자·입체영상 매체기술·휴먼로봇 시스템 등 미래 원천기술개발을 수행할 5개 센터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1990년대에 오존층 파괴의 주범으로 알려진 프레온가스(CFC)의 대체물질로 'HCFC-22', 'HFC-32', 'HFC-134a' 등을 개발했고, 1996년에는 조절방출형 백금착물 항암제를 개발했다. 이 항암제는 세계 최초의 고분자형 제3세대 항원제로 미국·일본 등 세계 32개국에 신물질로 특허 출원했다. 또 공업용 인조다이아몬드와 인조다이아몬드 박막 제조기술을 개발해 일진다이아몬드에서 기업화했고, 이 기술을 활용해 기존 VCR에 비해 내마모성을 25배나 높인 '다이아몬드 VCR 헤드드럼'을 개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