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도 없이 맨손으로 국산차 개발·초대형 선박 건조
10년 우여곡절 끝에 제철소 건설… 최첨단 반도체까지
KIST, 산업발전방향 제시… 21세기 내다본 '청사진' 그려
10년 우여곡절 끝에 제철소 건설… 최첨단 반도체까지
KIST, 산업발전방향 제시… 21세기 내다본 '청사진' 그려
■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1부> (2) 국가 신산업 연 '브레인들'
"제대로 된 종합제철소 계획안을 꼭 좀 만들어달라."
1969년 6월 김학렬 경제부총리는 취임하자마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로 달려가 금속가공연구실장이었던 김재관 박사를 만났다. 김 부총리는 외국의 모든 종합제철 건설계획서를 검토해 포항제철소 건설안을 다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두 달 반. 당시 외국 기업들이 작성한 건설안은 경제적 타당성이 부족해 국제금융기관들이 모두 투자를 거절하는 상황이었다.
제철소 설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된 개발도상국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철강은 '산업의 쌀'이라고 불린다. 사람이 쌀 없이 살 수 없듯이 철은 조선, 자동차, 기계, 반도체, 건설 등 모든 제조업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제철소 설립을 추진했지만, 기술과 경험은 물론 자본이 없어 난관에 부닥쳤다.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이런 나라에 종합제철소를 짓겠다는 데 선뜻 돈을 빌려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1.1972년 KIST 금속가공연구실장이었던 김재관 박사(왼쪽)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공업 수출 확대전략을 설명하는 모습이다.
◇종합제철소 건설 성사시킨 KIST의 '브레인'= 1961년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연간 생산량 30만t 규모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을 세워 미국과 독일, 프랑스 등을 대상으로 국제입찰을 했다. 하지만 규모가 너무 작고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차관 제공자를 찾지 못해 무산됐다. 이후 50만t으로 생산규모를 키우는 것으로 계획이 수정됐고, 1966년 12월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5개국 8개사가 참여한 국제 컨소시엄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구성됐다. KISA와 협상이 진행되면서 정부는 포항에 60만t 규모 제철소를 짓기로 결정했고, 1968년 제철사업의 주체로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설립했다. 하지만 경북 영일만 모래벌판에 제철소 설립 터를 마련하고 있던 1969년 KISA는 돌연 약속한 1억달러를 빌려주지 않고 등을 돌렸다. 세계은행(IBRD)이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은 시기상조이며 타당성이 없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 치명적이었다. 유진 블랙 IBRD 총재는 연차총회에서 "개발도상국들의 고속도로 건설이나 종합제철사업 추진은 국가 원수의 기념비 건립이나 다름없다"고 비아냥거렸다.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투입된 김학렬 부총리는 전문가 15명을 불러 '종합제철 건설추진 전담반'을 구성했다. 독일 유학으로 제철소 현장경험과 지식을 쌓은 김재관 박사와 미국 유학 후 경제기획연구실장을 맡고 있던 윤여경 박사 등 KIST 연구진이 주도한 전담반은 밤낮없이 매달려 '포항제철소 종합건설계획안'을 완성했다.
김재관 박사는 독일에서의 제철소 설계 경험과 한국의 경제 성장에 따른 국민소득 증가 추이, 자동차를 비롯한 중화학공업 확대 등 사회적 여건 변화, 수출 확대, 철강 수요 변동 추이 등 수많은 요소를 고려한 복잡한 수식을 풀어내 103만t 규모의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안을 만들었다. 100만t도 아닌 '103만t'이란 규모에는 가장 정확하고 합리적인 설계를 하겠다는 기술자들의 집념이 반영돼 있었다. 국제 기준을 충족하면서 경제적·기술적 타당성을 갖춘 이 새로운 계획안을 들고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일본에서 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아와 마침내 1970년 4월 1일 종합제철소가 착공에 들어갔다. 10년에 가까운 우여곡절 끝에 한국 공업화의 상징이 드디어 첫 삽을 뜬 것이다.
KIST는 이후에도 중공업연구실을 조직해 포항제철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일본제철소에서 정년퇴직한 우수 기술자 명단을 입수, 위촉 책임연구원으로 채용한 뒤 이들을 포항제철에 파견해 경험과 기술을 전수했다. 이밖에 공정 자동화에 이봉진 박사, 원료수급 대책 전산화에 성기수 박사가 참여하는 등 우리나라가 철강 강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 KIST인들의 숨은 노력이 곳곳에 배어들었다.
이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기술 개발이 무엇인가를 찾는 동시에 21세기를 내다보면서 우리나라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데 유리한 산업 분야를 찾는 '국가산업발전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KIST는 철강,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먹여 살린 주력산업의 청사진을 그렸다. 기업인들은 KIST에서 새로운 산업 아이디어를 얻어 갔고, 정부는 KIST가 마련한 산업 육성계획에 따라 산업화를 이끌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 중에서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고부가가치의 중공업 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정부는 국내 전자공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상공부는 1967년 9월 KIST에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 용역을 의뢰했다. 정만영 박사가 중심이 된 KIST 연구팀이 작성한 '국내의 전자산업실태조사보고서'는 이후 '전자공업진흥법' 제정의 밑바탕이 됐다. 또 KIST는 국립공업연구소와 한국정밀기기센터 등과 함께 국가전자공업진흥기관으로 선정돼 우리나라 전자공업 진흥의 동력을 마련했다.
반도체장치연구실장을 맡은 정만영 박사는 1966년 바이폴라 트랜지스터 제조에 성공해 국내 반도체 개발 역사를 열었다. 1970년대에는 민석기 박사팀이 실리콘 적층기술을, 김종국 박사팀이 발광다이오드(LED)를 개발했고, 1973년에는 미국 GE에서 일하던 김만진 박사가 반도체 생산장비를 들여와 TV용 반도체를 개발했다. 다음 해인 1974년에는 미국의 반도체 회사로부터 중고 장비를 기증받고 100여 평의 실험실을 확보하면서 연구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이후 1976년 반도체장치연구실은 반도체기술개발센터로 확대 개편됐다.
◇중공업·자동차 산업전략 설계= 1969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을 앞두고 정부는 공업화 계획 부문을 KIST에 의뢰했다. 당시 국가 산업 발전의 중심축은 도로, 항만, 통신 외에 경공업에 치우쳐 있었다. KIST 연구팀은 중공업 분야가 부가가치가 높고, 사회간접자본 형성에 크게 기여하며,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내용을 담은 '한국기계공업 육성 방향 조사연구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KIST는 기계소재와 중기계, 조선 분야의 중점 육성과 중공업단지 조성을 건의했으며, 1970년대 정부는 종합중기계공장·특수강공장·주물선공장·대형조선소 건설을 '4대 핵심 전략사업'으로 중점 육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사업은 1973년 6대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으로 확대 개편돼 대규모 국가사업으로 추진됐다.
KIST 선박연구소의 김훈철 박사는 3차 경제 개발계획의 조선공업 부분을 맡아 "우리도 25만t 화물선을 만들 수 있다"며 대형 조선소 건설을 제안했다. 당시 국내에는 2700t급 화물선을 수리하는 곳밖에 없던 때라 대형 조선소를 만들자는 그의 제안에 터무니없다는 반응도 많았지만, 그의 주장대로 현대중공업이 설립되고 우리나라 조선 산업의 신화도 시작됐다. 당시 김 박사는 선박도면은 영국에서 사오고, 조선에 제일 중요한 용접기술은 스웨덴에서 전수받자고 제안했다. 경제인 회의에서 이 계획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조선 사업을 제안했다.
한국에서 개발한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 '포니'의 탄생 뒤에도 KIST의 제안이 있었다. 1973년 1월 채택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는 KIST 연구팀의 조사보고서와 정책 제안이 핵심이 된 자동차공업 육성정책이 포함됐다. KIST 연구팀은 이를 통해 "한국의 고유 모델 자동차 개발과 중점적 육성을 정부가 공익사업으로 주도해 나가야 한다"는 내용을 건의했다.
특히 각종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에 참여했던 김재관 박사는 1973년 1월 상공부 초대 중공업차관보로 임명돼 20여 년 동안 추진해 온 '외국 모델차의 상향식 국산화 정책'을 폐기하고 고유 모델차 개발을 기반으로 한 '장기 자동차공업진흥계획'을 수립했다.
남도영기자 namd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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