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규제에 묶여 갈팡질팡… 올해 5400조원 세계시장 구경만
■ 창간 15주년 기획-15대 어젠다
(4) 갈팡질팡 헬스케어 규제부터 혁파해야
# 올초 미 식품의약국(FDA)은 의료기기 업체 덱스콤이 내놓은 모바일 헬스케어 시스템 '덱스콤 셰어'를 공식 승인했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당뇨병 환자의 혈당 수치가 의사에게 실시간 전달되고, 보호자도 원격에서 알 수 있다. 미국이 의료기기와 연동 가능한 모바일 헬스 앱을 공식 승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FDA는 2월에는 개인 유전자 분석업체 '23앤드미(23andMe)'의 서비스를 허가했다. FDA가 의사 없이 민간 업체가 소비자에게 유전자 분석 서비스를 승인한 것은 최초다.
미국이 헬스케어 신기술에 대한 규제를 과감히 푸는 것은 헬스케어가 ICT에 이은 먹거리 산업이란 인식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ICT와 생명공학, 나노기술 등이 헬스케어를 중심으로 융합하면서 스마트폰에 이은 '기술빅뱅'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 IT 공룡기업들은 미래 헬스케어 산업 투자를 크게 늘리며 진검승부를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허가 과정으로 유명한 FDA가 그동안의 보수적 입장을 버리고 올초 전폭적인 규제 완화에 나서는 것은 이 같은 시장변화와 흐름을 같이한다.
하지만 한국은 과도한 규제와 기술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제도 때문에 세계 무대에서 이름도 못 내밀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 절감'과 '산업 성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제도로 인해 발목이 잡힌 제약산업과 의료기기산업 세계 점유율은 1.6%, 1.2%에 머물고 있다. ICT 경쟁력을 무기로 세계 시장을 선점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 디지털 헬스케어 역시 규제에 가로막혀 아직 제대로 된 서비스를 시작조차 못 하고 있다.
특히 원격의료는 원론적인 논쟁에 가로막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허용을 추진하는 정부와 반대하는 의료계가 구체적인 해법이나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모적인 논쟁을 거듭하는 동안, 모바일, 웨어러블, IoT(사물인터넷) 등 기술 변화에 대한 제도적 기반은 뒷걸음질만 치고 있다. 가능성을 보고 뛰어든 사업자들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SK텔레콤과 서울대병원은 스마트폰으로 의사가 환자의 운동상태와 식생활을 실시간 체크하고 조언해 주는 모바일 헬스 서비스를 개발하고도 기능을 모두 숨긴 채 내놔야 했다. 질병 진단·치료와 다른 건강관리 서비스지만, 명확한 규정과 제도가 없다 보니 의사와 환자 간 원격의료로 규정돼 불법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FDA가 2011년 모바일 헬스 앱에 대한 가이드라인 초안을 내놓고, 꾸준히 개선하는 미국과 대조적이다. FDA는 올 1월에는 건강관리 기기와 의료기기를 구분하는 기준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내놓기도 했다.
앞으로 헬스케어 서비스는 개인 의료·건강생활 정보와 유전체 분석정보 등을 한데 모아 관리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을 기반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이 때문에 플랫폼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기업간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지난해부터 삼성전자의 '사미(SAMI)', 애플 '헬스킷', 구글 '구글핏' 등이 선보였고, 영국과 중국 등은 유전체 정보 등 국민 건강정보를 수집한 '의료 빅데이터' 구축과 활용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국민건강보험 체제 하 거대 의료 빅데이터를 보유하고도, 개인정보보호 논란에 부딪혀 제대로 활용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병원 현장에 축적된 의료 데이터 역시 종이 차트 시대의 기준인 '모든 진료정보는 병원 시설 내에 보관해야 한다'는 제도에 가로막혀 병원 담장을 넘지 못하고 있다.
홍경표 KT 융합기술원 컨버전스연구소장은 "웨어러블 기기로 수집한 건강정보와 개인 유전체 분석정보, 정부와 의료기관이 보유한 의료 빅데이터를 통합하면 기존 의료서비스 생태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며 "해외에선 이런 데이터를 관리하는 헬스케어 플랫폼 선점 경쟁이 치열하지만 국내에선 개인정보보호 등 제도 문제로 접근조차 못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대로 가다간 올해 5조달러(약 5400조원), 2020년 6조9000억달러(약 7500조원) 규모로 전망되는 글로벌 헬스케어 산업에서 한국이 설 곳은 사라진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헬스케어는 국민 건강과 직결돼 규제가 매우 민감하게 적용되는 분야이지만 지금같이 정부가 의료계, 산업계, 시민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한다면 세계 헬스케어 산업에서 '코리아'의 이름은 찾기 어려울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최윤섭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교수는 "규제는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자국민들이 혁신적인 서비스의 조속한 혜택을 받는 것을 방해하거나, 때로는 기술 개발과 혁신에 대한 동인을 저해하기도 한다"며 "불필요하게 지나친 규제가 오히려 국민의 건강권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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