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세상] 한국형 실리콘밸리의 조건

원재준 노키아지멘스네트웍스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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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12-2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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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분야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것이 있다. 환경 운동이나 국제 교육 분야에서도 종종 쓰이는 이 말은 생각은 글로벌하게 하되 행동은 가까운 곳부터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패트릭 게디스로 그는 경영학 전문가가 아닌 도시계획가라는 점이 이채롭다. 그가 1915년에 발간한 저서 진화하는 도시에서는 이같은 컨셉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도시 계획론을 설명하고, 산업혁명 중이던 영국 에딘버러의 낙후 지역이었던 올드 타운에 기숙사를 건립함으로써 지역의 재도약과 발전을 유도했다.

게디스가 주장하던 이 이론의 핵심은 공간 구성(spacial form)을 통하여 사회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Act Locally는 사회 구성원들이 상호 접촉을 하는데 있어 물리적인 배치가 매우 중요하며, 이를 통하여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공간 구성을 통해 엄청난 효과를 얻은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의 실리콘 밸리다. 몇 년 전 벤처펀드를 조성하기 위하여 실리콘 밸리로 처음 출장을 가면서 수많은 벤처 기업의 요람인 실리콘 밸리는 도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 했었다. 벤처 성공 사례를 읽다보면 종종 등장하는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로(University Avenue), 엘 카미노 레알, 산호제, 샌드힐 로드, 구글플렉스라고 불리는 구글 본사 등을 방문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실리콘 밸리라고 특별한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실리콘 밸리는 정말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는 곳이다. 나즈막한 건물들이 몇 개 있을 뿐 그다지 첨단스럽지도, 그렇다고 창의성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 독특하기로 유명한 구글 본사에서도 역시 그다지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직원들에게 무제한으로 음식과 음료, 식사를 제공하고, 리셉션 직원이 황소만한 개를 옆에 두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는 점이 조금 특별할 뿐이었지만, 그것이 벤처 성공의 원인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토록 평범해 보이는 곳에서 세계 굴지의 Think Globally하는 첨단 기업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나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은 그 지역의 여러 기업을 방문하고, 실리콘 밸리의 베테랑들과 대화하면서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행동반경이 의외로 좁다는 것, 즉 Act Locally하다는 것이다. 실리콘 밸리는 일반적으로 스탠포드 대학이 있는 팔로 알토의 북쪽부터 남쪽의 산호제까지 여러 개의 작은 도시들을 연결하는 지역을 말한다. 한시간 정도 북쪽으로 차를 몰고 가면 샌프란시스코이니 만약 서울 수도권에 비유한다면 접근성 면으로 봤을 때 수원이나 파주 정도로, 다시 말해 서울 수도권의 위성도시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여기서 실리콘 밸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관련 비즈니스 분야의 중요한 모든 과정을 실리콘 밸리 지역 내에서 모두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에코 시스템은 신기술을 연구하는 스탠포드 대학교, 신기술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 신기술을 구현하는 벤처 기업, 그리고 그 기술과 벤처 기업을 흡수하여 상용화하는 대형 기업들로 구성된다.

이 네 가지 축의 물리적인 위치를 보면 실리콘 밸리의 경쟁력이 보인다. 엄청난 규모의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 바로 북쪽에 트여있는 길은 유수의 벤처캐피탈 회사들이 위치하고 있는 샌드 힐 로드다. 구글에 투자한 KPCB, 세콰이어캐피탈, 스탠포드 벤처 프로그램을 스폰서링하는 DFJ를 포함하여 길 전체가 수많은 벤처캐피탈 업체로 채워져 있다. 물론 고층 빌딩이 아닌 마치 방갈로 같이 생긴 1, 2층 높이의 건물들이 주차장을 사이에 끼고 늘어서 있다. 따라서 벤처 기업이 투자 유치를 위해 길을 나서면 하나의 길에서만 최소 20개 이상의 투자회사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동쪽으로는 엘 까미노 레알이라는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길이 있고 이 길에서 시작해서 여러 고속도로를 타고 산호제로 내려가다 보면 그야말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들의 간판을 줄줄이 볼 수 있다. 구글, 오라클, 애플, 인텔, 시스코 등의 본사가 전부 이 지역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업들은 직접 신기술을 개발하기도 하지만 학교나 벤처 기업들에 의해 개발된 기술과 벤처캐피탈 업체들이 투자한 회사를 인수하여 사업을 키우는 역할도 하고 있다. 즉 대학에서 기술이 나오면 벤처캐피탈에서 투자하고, 상용화와 투자 회수는 대기업들이 해주는 자연스런 생태계가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한 유명한 벤처캐피탈리스트는 만약 자기 회사에서 차로 30분 이내 거리에서 회사 경영진을 만날 수 없다면 그 회사에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 비즈니스의 모든 프로세스 단위가 차로 30분 거리 이내에 위치하고 있는 이같은 벤처 생태계는 가까운 거리로 인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얻고 있으며, 이를 통해 눈부신 속도의 발전을 거듭하며 전세계 신기술 산업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벤처투자가 활성화된 70년대 이후 실리콘 밸리는 반도체, 통신, 인터넷 서비스를 거쳐, 지금은 녹색성장을 테마로 별다른 정부지원도 없이 진화해가고 있다. 구글에 투자한 KPCB의 존 도어, 썬을 창업한 비노드 코슬라 등은 이미 녹색기술 기업 투자와 육성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리적으로 상호 접근성이 좋다는 것은 다시 말해 친밀한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인맥의 중요성을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 네트워크 내에서 사업 아이디어 개발, 회사 설립, 투자 유치, 사업 개발, 그리고 결국 회사 매각에 이르는 에코 시스템의 모든 요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하여 신뢰가 생기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또다른 벤처 기업을 창업하는 과정이 반복되는 셈이다. 세계 최고의 벤처캐피탈인 KPCB의 모토가 Relationship & venture Capital이라는 점에서 인맥의 중요성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실리콘 밸리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지역이 몇몇 곳에 분산되어 있는 양상을 보인다. KAIST를 중심으로 한 대덕연구단지, 벤처캐피탈과 벤처 기업을 중심으로한 테헤란 밸리, 중소기업을 위주로한 구로 디지털단지 등이 있다. 그러나 대덕에는 벤처캐피탈이 매우 빈약하고, 테헤란 밸리에는 학교가 없으며 구로에는 학교도 없고 벤처캐피탈도 거의 없다.

물론 서울지역 전체를 본다면 대학교들도 많고 행정부처, 기업, 벤처캐피탈도 많다. 각 기능이 한 도시 안에 있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거리가 아닌 물리적, 심리적 접근성과 시간의 활용도 차원에서 보면 아무래도 큰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대기업이 많지만 벤처기업을 활발하게 인수해주는 대기업은 하나도 없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이는 국내의 불필요한 규제, 다소 부족한 노동 유연성이나 사업 방식의 차이로 인한 부분도 상당히 크기 때문에 단순히 지리적인 배치만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는 하다. 다만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벤처 기업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 개발이나 그 서비스를 장기적인 산업 경쟁력 향상에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패트릭 게디스는 도시계획가이면서도 생물학자였으며, 역사학자들이 그를 녹색정치의 창시라고 할 정도로 선구적인 환경운동가였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계와 비즈니스계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녹색성장 구호는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실리콘 밸리, 나아가 전세계를 움직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고 있다.

패트릭 게디스가 생존해 있다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정부의 정책적 지원, 획기적인 녹색 기술 개발 그리고 그를 통한 성장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앞당길 수 있는 가장 기본이 되는 벤처 산업 육성의 밑그림을 실리콘 밸리의 예, 그리고 패트릭 게디스의 Think Globally, Act Locally란 말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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