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 광장] 기반산업 일구는 기술 명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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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03-0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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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길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선임연구본부장


전남 보성실업고 자동차과에 다니는 박지현(19) 양은 자격증이 21개나 된다. 자동차과는 컴퓨터를 이용한 차체의 내외장, 전장 설계, 구조해석, 진동 소음 등 각종 테스트에서부터 부품설계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분야가 많다. 그렇긴 해도 여고생이 자격증을 21개나 보유하고 있다니 놀랍고도 대견하다. 하기야 남학생 일색인 자동차과를 지원한 것에서부터 박 양의 포부와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지역에선 이미 화제의 주인공이었던 박 양은 `2008 대한민국 인재상'을 수상하면서 더욱 유명인사가 됐다. 창의적 발상과 활동상 등 지덕체를 겸비한 전인적 소양을 종합 평가해 선정하는 이 상은 고교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총 100명을 가린다. 카이스트, 외고 등에 재학 중인 수상자들 틈에서 유독 박 양의 존재가 돋보이는 것은 숙련된 기술자들이 떠나고 있는 산업현장의 빈자리를 여성의 섬세함으로 메울 수 있으리란 희망 때문이다.

지난해 개최된 제 43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는 주조 종목에서 첫 여성 선수가 배출돼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다. 펄펄 끓는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물건의 형태를 만드는 주조 분야는 그 동안 남성들만의 고유영역으로 인식돼 왔기 때문이다.

은메달을 따내 예선을 통과했던 국언진(18) 선수는 하루 12시간씩 연습하며 본선을 준비해 왔다고 한다. 경기기계공고에 재학 중으로, 이미 자격증까지 보유한 주조기능사다. 이 날 주어진 과제는 `벨트풀리(Belt Pulley)'라고 불리는 자동차 동력 전달장치를 4시간 반 안에 정교하게 제작해 내는 것이었다.

23명의 참가선수 가운데 10명이 기권하거나 실격됐을 정도니 꽤 힘든 과제였던 모양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과제를 받고 당황했다는 국언진 선수는 놀라운 집중력과 끈기로 시제품을 완성해 냈다. 그리고 결국 금녀의 벽을 허문 첫 도전에서 최초의 여성 금메달리스트라는 기록까지 세우게 됐다. 험한 일이지만 산업의 근간이라며, 열심히 연마해 대기업에 취직하겠다는 이 어린 주조 기능사의 포부가 귀하고 듬직하다.

1833명의 선수들이 기량을 겨룬 그 대회에서 50여 개 종목별 금메달 입상자에게는 상금 1200만원과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출전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나라는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24번 참가해 15번의 종합우승과 4번의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그러나 선수들의 기량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데 비해 사회적 관심은 갈수록 줄고 있으니 안타깝다.

가장 최근의 카퍼레이드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선전하고 귀국한 선수들을 환영하는 서울 도심에서 열린 바 있다. 60ㆍ70년대에는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을 위해 대대적인 카퍼레이드를 벌였었다. 그만큼 기능인들이 대우받던 시절이었고, 기능인들에 거는 관심과 기대가 컸던 시절이었다.

축제처럼 펼쳐지던 카퍼레이드의 풍경이 지금 기억에도 생생하다. 오픈카에 올라 탄 선수들의 가슴에서 빛나던 것이 비단 메달뿐이었으랴. 세계와 견주어 일등을 따냈다는 자신감, 스스로 산업발전의 주역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눈부셨다. 정부가 내렸던 상금의 규모만도 당시 집 한 채 값이었으니, 기능인들의 긍지와 보람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대다수 국민들은 전국기능경기대회는 물론 국제기능올림픽이 열리는 것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카퍼레이드가 사라진 것과 때를 같이 해 솜씨 좋은 젊은 기술자들이 산업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경제 성장의 동력을 수출에서 길어오는 것은 여전한데도, 그 주역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줄고 있으니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되는 것도 당연하다.

관심이 줄었다고 해서 그 중요성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국언진 선수가 명장의 꿈을 키우고 있는 주조 분야만 해도 자동차, 기계, 선박, 전자 등 주력산업의 경쟁력을 떠받치는 국가 기반산업이다. 평균 2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지는 자동차의 경우 주물 부품이 중량의 22%를 차지할 만큼 그 비중이 크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컴퓨터 스스로 최적의 부품 및 공정을 설계하는 `사이버 엔지니어 U24'를 통해 주조관련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지만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생산자의 대다수가 영세 중소기업인 만큼 이들 대부분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지원책이 따라야만 한다. 기반 없는 첨단은 있을 수 없다. 첨단산업의 빛에 가려진 기반산업, 그리고 관련 기능인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확대돼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