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규 칼럼] 물길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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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규 정보미디어 부장


농사를 위한 물길 싸움은 이 세상 목숨 걸고 벌이는 그 어떤 싸움 중에서도 으뜸이다.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며 물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하던 시절, 농사에서 물길은 사람의 생명을 지탱하게 하는 핏줄 역할을 했다. 핏줄은 심장에서 아무리 먼 곳에 위치한 손끝 발끝까지도 뜨거운 피를 내려보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물길싸움은 대를 이어 집안사이에 원수를 만들거나, 심하면 살인까지 불사한 물러설 수 없는 전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물길을 바꾸기 위해 정략결혼도 마다하지 않았다. 윗동네 이진사집 아들과 아랫동네 권참판집 딸이 혼인을 하고, 두 집안이 마을 대부분의 물길을 확보하게 된다. 한 해 두 해 하늘만 쳐다보며 비가오길 바라던 마이너 농사꾼들은 쩍쩍 갈라지는 땅, 타들어 가는 논밭을 보면서 전답을 이-권씨 집안에 넘긴다. 물길을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가진 자는 더 갖게 되고, 못 가진 자는 가슴속에 서슬 퍼런 칼을 갈다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트린다. 조정은 대 혼란을 우려하면서, 이-권 집안의 정략결혼에 참견한다. 혼인은 하되, 물길 때문에 다른 농사꾼들이 땅을 포기하고 목숨을 끊는 일은 없게 해야 한다고.

그런데 이런 참견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이다. 파고 들어가 보니 이진사와 권참판 집안이 혼인을 해도 물길이 한 갈래로 독점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 마을에는 정진사, 조참판, 또 다른 정진사, 박진사, 이참판도 있었다. 이들 역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작은 저수지와 물길을 확보했다. 더군다나 이-권 집안의 혼사소식에 긴장한 다른 집안들도 혼담이 오가고 날짜잡기에 바쁘다. 이들의 혼사가 모두 이뤄진다면 마을은 세 갈래의 물길로 쪼개진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조금 더 많은 물길을 확보하긴 하겠지만, 큰 그림의 질서와 평화는 이어지리라.

2009년 우린 통신시장의 구조개편 현장에서 물길싸움과 같은 `필수설비' 논란에 휩싸여 있다. 시대가 바뀌고, 소재는 다르지만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담론은 같다. 방송통신업계에서 거대 합병에 대한 경쟁업체들의 걱정은 이-권씨 집안의 혼인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KT와 KTF의 합병은 유선과 무선의 설비가 하나가 되고, 유선전화ㆍ이동전화ㆍ초고속인터넷 등 4000만이 넘는 막강한 가입자기반이 하나의 법인으로 통합됨을 의미한다. 이런 영향력이 다른 물길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려와 걱정, 논란을 잠재울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조정이 어차피 마을일에 참견하기로 했다면, 마을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고 그 마을이 더 많은 쌀을 생산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면, 혼사를 통해 만들어지는 물길이 다른 농사꾼들의 농사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게 하면 될 일이다. 또, 다른 집안의 혼사에 따라 새로 만들어지는 물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잘 파악해 힘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렵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는 참견, 이것이 지금 필요한 조정자의 역할이다. 여러 물줄기 가운데 하나의 물길에 힘이 쏠려 다른 물길을 파괴한다면 마을엔 강요된 침묵만이 흐른다. 서로 견제 가능한 경쟁체제, 균형은 마을 전체가 생존하기 위한 기본 요건이다.

임윤규 정보미디어부장 yk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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